믿고 따르던 스승이 죽고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는 나눌 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도 ‘구세주’ 예수님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답이 없는데 계속 말 해봤자 고통스러운 기억만 떠오를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힘없이 자기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셨습니다. 교회가 고통의 문제를 선뜻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 앞서 고통 당하신 예수께서 먼저 입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한 고통과 제자들의 곤고한 처지에 관하여 어떤 해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더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故 백희숙 권찰님의 아버지이신 백승하 권찰님께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먼저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로선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애통한 마음에서 흘러나온 간증은 시종 교인들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님을 통해 “나를 사랑하느냐?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픔은 문제가 아니라 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잘 해결하기만 하면 사라지지만, 길은 그저 나아가거나 뒷걸음칠 수만 있을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해답을 주시지 않고 방향만 물으신 것 같습니다. 사랑의 방향으로 가는가, 각각의 도피처로 흩어져 돌아가는가.
이어서 정해경 집사님께서 故 백희숙 권찰님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들을 간증하시며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왜 예수께서 두 분의 성도님을 통해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시는지, 사실 제 마음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 앞에 저는 떳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피한 베드로와 같이, 저는 요 며칠 간 저만의 바쁜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회고적인 고백이 아니라 의지의 표현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반복적으로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늘 부족하고 길을 잃고 뒷걸음질 치는 저에게 베드로의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실은 ‘죄송합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더 잘 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을 대언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목사님은 팔복 중 하나인 ‘애통의 복’이 단순히 위로받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애통함 없이 마냥 기쁘기만 한 예배는 껍데기일 뿐이고 애통하는 자만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다고. 아픔이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딛고 가는 길임을, 주님의 죽음에 통곡해본 제자만이 주님의 부활에 기뻐할 수 있음을, 그래서 성도들이 함께 애통할 때 아픔이 치유된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소망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애통하고, 이웃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지 못했던 자신의 죄에 애통하는 심령은 성도라면 반드시 예배 자리에 가지고 와야 할 헌물인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던지신 질문의 변주처럼 들렸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해서 여기 온 것이냐,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온 것이냐?
사랑한다면 애통하는 심령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설교 후반부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질문이 담긴 특정 구절이 합작하여 저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다른 성도들의 헌신과 예배에 대리만족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예배를 사모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설교 내용을 생각하면서 평소 묵상하던 예수님의 질문을 다시 읽어 보니,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구절이 눈에 밟힙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다른 시몬 말고 요한의 아들 시몬, 세상에 한 명 밖에 없는 바로 너. 용인 이동면 송전리의 최지현아, 김태식 집사나 장다은 집사 말고 바로 최 집사 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 앞에서 베드로를 ‘울상’으로 만들었던 깊은 자괴감 같은 것이 내게 있었던가요? 애통하는 심령은 혼자서 감정을 쥐어 짜내거나 주변 분위기에 적응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교제하는 가운에 주께서 ‘말씀의 은혜’로 내려주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간증, 간증, 설교... 예수님 말씀이 세 번 울린 후에 저도 베드로처럼 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모든 간증과 설교가 그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께서 힘든 상황 속에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시는지 지켜보면서 ‘땅에서 하늘을 사는 공동체’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슬픔이 있는 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꿋꿋이 걸어간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또한 성도님들의 걸음에 보조를 잘 맞추지 못했던 저 자신의 부족함을 재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각 지체들에게 저마다의 부흥이 일어나고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주님의 역사가 계속해서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故 백희숙 권찰님 댁에 주님의 위로가 나날이 더하여지기를 기도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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